제 9회 고양국제무용제에 대한 시민의 감상
작성자
admin
작성일
2023-10-25 20:59
조회
713
이제 우리는 무용에 담긴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두근두근! 작별한 그리운 애인을 만나는 마음으로 제9회 고양국제무용제와 재회했다.
첫째 날 공연은 고양안무가 & 해외초청 작품으로 올려졌다. 임선영☓아라베스크 무용단의 ‘Melting’, 두아코 댄스컴퍼니의 ‘1℃’, Dance 친린이의 ‘Mr. Papillion’, 댄스 프로젝트 나무 ‘나무뎐’의 ‘차나(叉拏)’ : 같은 시공간의 다른 기억’, 김태경의 ‘이브'가 감동을 선사했다. 둘째 날 공연은 국제교류안무가초대전으로 99아트컴퍼니의 ‘에카’, 강요찬의 ‘더 테이블 3’, 모든컴퍼니의 ‘의지들’이, 셋째 날 공연은 장은정☓박호빈의 ‘친애하는 그대에게’, 이이슬의 ‘오라’, 춤판야무 금배섭의 ‘닮아가는’, 이은주의 ‘금선무’, 조윤라☓김희현의 ‘왈츠#10’이 마지막 대미를 장식했다.
그렇다, 나는 3년째 가을이 오면 고양국제무용제를 애인처럼 기다린다. 나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비교적 큰 사람으로서,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알고 싶은 욕구가 크다. 그럼에도 무용은 내 관심사의 카테고리에 전혀 없었던 예술 장르였다. 이유로는, 내 삶에 있어 무용 공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게 무용은 낯선 존재였다.
그러나 2021년 <제7회 고양국제무용제>를 만나면서 나는 달라졌다. 3년 동안 3차례의 무용 공연을 관람을 했을 뿐인데 어렵기만 했던 무용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용제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내가 3년간 지켜본 현대 무용은 고고한 전통성을 훌륭하게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대중이 무용과 같은 깊이가 깊은 예술 장르에 하루아침에 빠져들거나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그들의 애틋한 노력이 있었기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무용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모진 상황 속에서도 9년째 축제의 불을 밝힌 <고양국제무용제>의 노력처럼 말이다.
이에, 나는 이번 무용제를 두 가지 시선으로 접근해서 보았다.
첫째, 무용예술이 각 분야 간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 속으로 한층 다가섰다는 느낌을 받았다. 크로스오버 예술이라고 하던가? 고양국제무용제는 그야말로 융합예술을 선보였다. 안무, 음악, 무대 예술의 삼박자의 화합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기 충분했다.
두 번째 날에 선보인 강요찬 안무가의 ‘더 테이블 3’는 행위예술과 현대무용과 스트리트 댄스가 융합되어 새로운 장르로 재탄생되었다. 뮤지컬인가? 연극인가? 아니다. ‘더 테이블 3’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융합예술인 것이다. 이 작품의 기획된 의도는 누군가 정해 놓은 규율, 규칙, 혹은 정의를 탈피하여 진정한 나를 상상하고 찾아가는 새로운 실험의 무대라고 한다. 이날 이준, 양지수, 오하솜 무용수의 유쾌하고 수준 높은 퍼포먼스가 관객들의 많은 환호를 받았다.
세 번째 날 무대에 오른 이이슬의 ‘오라’! 첫 등장부터 나는 벌써 전율이 일었고 이미 재미있었고 감동했다. 현대무용으로 여겨진 4차원의 퍼포먼스가 첫 등장이었다. 판타스틱한 도입 부분이 지나자 국악의 선율과 춤사위가 등장한다. 이이슬의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이 결합된 유니크한 춤이 세련되고 강렬했다. 독무의 무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대를 장악하는 힘이 컸다. 퓨전스타일의 배경 음악이 잘 녹아든 것도 한몫했을 것이며 꽹과리를 사용해서 설치한 무대예술도 매혹적이다. 국악풍의 노랫가락이 슬프고 처절하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마치 고통스럽고 애달픈 삶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관객의 상상력이 최고조로 밀려온다. 관람 후, 작품 설명을 읽어보니 이 작품은 사각지대에 몰린 노동자들의 쓸쓸한 죽음을 애도하는 사회문제를 다룬 것이라 했다. (참고로 나는 공연 관람 전에 미리 작품 설명을 읽지 않는다. 나의 느낌대로 상상대로 관람 후 작품 설명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가깝게 작품을 이해하고 보았는지 대조해 보는 걸 좋아한다.)
둘째, 이제 우리는 무용에 담긴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고양국제무용제는 무용이 육체의 미학에 집중되어 있다는 나의 아마추어적인 사유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현대무용은 시대정신을 말하는 문학이며 삶을 사유하는 철학이며 내적 갈등을 표출하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이제 무용은 미학적인 것을 넘어선 철학으로 설명된다.
뜨거운 대륙의 열기에 몸이 녹아 사라질것 같은 소멸의 철학을 담은 베트남팀의 ‘Melting’, 환경문제의 고민을 표현한 ‘1℃’, 인간의 껍질 속에서 고치를 부수고 나오는 장자의 꿈을 춘 친린이의 ‘Mr. Papillion’, 곧 1주기를 맞이할 10. 29 참사를 애도하는 우리만의 의식을 표현한 99아트컴퍼니의 ‘에카(Ekah : 구약성서 예레미아 첫 소절로 ‘아! 어찌하여! 와 같은 비통함을 표현한 히브리어 감탄사)’, 닳아짐으로 인해 닮아가는 과정의 사유를 차곡차곡 성실하게 쌓아 올린 춤판야무 금배섭의 춤……. 이외에도 무대에 올린 모든 작품을 나열하고 싶지만 나의 과한 응원의 말이 자칫 지루할 수 있기에 아쉽지만 여기에서 멈추고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무용이 말하는 철학들을 전부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이 강요된 사회로 경직된 우리는 말해야 할 것들은 말해야 한다. 이에, 무용으로 말하는 철학은 직설적인 언어가 아니라서 부드러운 공감의 힘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올해 무대에 올려진 작품에서 무용예술이 규정된 틀을 깨고 다시 재 탄생되어 대중에게 새롭게 다가서는 빛나는 노력들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문화와 예술이 대중화가 된다는 것은 사람 간의, 계층 간의, 집단 간의 경계를 허무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들에겐 창작(새로운 도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대중에 대한 문화적 배려이며 대중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리고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은 불균형을 극복한, 점차 균형을 찾아가는 회복된 사회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평등한 사회가 별다른 것인가? 무용예술을 포함한 모든 장르의 예술을 다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그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문화와 예술 속에서 피어오르는 평등정신이 아닐까?
고양국제무용제는 그 평등한 문화적 기회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양국제무용제를 힘껏 응원한다. 이 무지개 같은 희망적인 감동을 평범한 나 같은 사람에게 선물하는 이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지자체가 제공하는 수준 높은 문화적 배려와 돌봄으로 힘든 삶의 위안을 얻게 된다. 최고의 대접을 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다만 올해는 스케일이 큰 무대를 보지 못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작년대비 예산이 대폭 줄었다 한다. 에카(Ekah)! 오호 통제라……. 내년에는 한 사람의 고양 시민으로서 문화적 향유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되찾고 싶다. 진정으로….
두근두근! 작별한 그리운 애인을 만나는 마음으로 제9회 고양국제무용제와 재회했다.
첫째 날 공연은 고양안무가 & 해외초청 작품으로 올려졌다. 임선영☓아라베스크 무용단의 ‘Melting’, 두아코 댄스컴퍼니의 ‘1℃’, Dance 친린이의 ‘Mr. Papillion’, 댄스 프로젝트 나무 ‘나무뎐’의 ‘차나(叉拏)’ : 같은 시공간의 다른 기억’, 김태경의 ‘이브'가 감동을 선사했다. 둘째 날 공연은 국제교류안무가초대전으로 99아트컴퍼니의 ‘에카’, 강요찬의 ‘더 테이블 3’, 모든컴퍼니의 ‘의지들’이, 셋째 날 공연은 장은정☓박호빈의 ‘친애하는 그대에게’, 이이슬의 ‘오라’, 춤판야무 금배섭의 ‘닮아가는’, 이은주의 ‘금선무’, 조윤라☓김희현의 ‘왈츠#10’이 마지막 대미를 장식했다.
그렇다, 나는 3년째 가을이 오면 고양국제무용제를 애인처럼 기다린다. 나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비교적 큰 사람으로서,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알고 싶은 욕구가 크다. 그럼에도 무용은 내 관심사의 카테고리에 전혀 없었던 예술 장르였다. 이유로는, 내 삶에 있어 무용 공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게 무용은 낯선 존재였다.
그러나 2021년 <제7회 고양국제무용제>를 만나면서 나는 달라졌다. 3년 동안 3차례의 무용 공연을 관람을 했을 뿐인데 어렵기만 했던 무용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용제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내가 3년간 지켜본 현대 무용은 고고한 전통성을 훌륭하게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대중이 무용과 같은 깊이가 깊은 예술 장르에 하루아침에 빠져들거나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그들의 애틋한 노력이 있었기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무용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모진 상황 속에서도 9년째 축제의 불을 밝힌 <고양국제무용제>의 노력처럼 말이다.
이에, 나는 이번 무용제를 두 가지 시선으로 접근해서 보았다.
첫째, 무용예술이 각 분야 간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 속으로 한층 다가섰다는 느낌을 받았다. 크로스오버 예술이라고 하던가? 고양국제무용제는 그야말로 융합예술을 선보였다. 안무, 음악, 무대 예술의 삼박자의 화합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기 충분했다.
두 번째 날에 선보인 강요찬 안무가의 ‘더 테이블 3’는 행위예술과 현대무용과 스트리트 댄스가 융합되어 새로운 장르로 재탄생되었다. 뮤지컬인가? 연극인가? 아니다. ‘더 테이블 3’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융합예술인 것이다. 이 작품의 기획된 의도는 누군가 정해 놓은 규율, 규칙, 혹은 정의를 탈피하여 진정한 나를 상상하고 찾아가는 새로운 실험의 무대라고 한다. 이날 이준, 양지수, 오하솜 무용수의 유쾌하고 수준 높은 퍼포먼스가 관객들의 많은 환호를 받았다.
세 번째 날 무대에 오른 이이슬의 ‘오라’! 첫 등장부터 나는 벌써 전율이 일었고 이미 재미있었고 감동했다. 현대무용으로 여겨진 4차원의 퍼포먼스가 첫 등장이었다. 판타스틱한 도입 부분이 지나자 국악의 선율과 춤사위가 등장한다. 이이슬의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이 결합된 유니크한 춤이 세련되고 강렬했다. 독무의 무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대를 장악하는 힘이 컸다. 퓨전스타일의 배경 음악이 잘 녹아든 것도 한몫했을 것이며 꽹과리를 사용해서 설치한 무대예술도 매혹적이다. 국악풍의 노랫가락이 슬프고 처절하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마치 고통스럽고 애달픈 삶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관객의 상상력이 최고조로 밀려온다. 관람 후, 작품 설명을 읽어보니 이 작품은 사각지대에 몰린 노동자들의 쓸쓸한 죽음을 애도하는 사회문제를 다룬 것이라 했다. (참고로 나는 공연 관람 전에 미리 작품 설명을 읽지 않는다. 나의 느낌대로 상상대로 관람 후 작품 설명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가깝게 작품을 이해하고 보았는지 대조해 보는 걸 좋아한다.)
둘째, 이제 우리는 무용에 담긴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고양국제무용제는 무용이 육체의 미학에 집중되어 있다는 나의 아마추어적인 사유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현대무용은 시대정신을 말하는 문학이며 삶을 사유하는 철학이며 내적 갈등을 표출하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이제 무용은 미학적인 것을 넘어선 철학으로 설명된다.
뜨거운 대륙의 열기에 몸이 녹아 사라질것 같은 소멸의 철학을 담은 베트남팀의 ‘Melting’, 환경문제의 고민을 표현한 ‘1℃’, 인간의 껍질 속에서 고치를 부수고 나오는 장자의 꿈을 춘 친린이의 ‘Mr. Papillion’, 곧 1주기를 맞이할 10. 29 참사를 애도하는 우리만의 의식을 표현한 99아트컴퍼니의 ‘에카(Ekah : 구약성서 예레미아 첫 소절로 ‘아! 어찌하여! 와 같은 비통함을 표현한 히브리어 감탄사)’, 닳아짐으로 인해 닮아가는 과정의 사유를 차곡차곡 성실하게 쌓아 올린 춤판야무 금배섭의 춤……. 이외에도 무대에 올린 모든 작품을 나열하고 싶지만 나의 과한 응원의 말이 자칫 지루할 수 있기에 아쉽지만 여기에서 멈추고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무용이 말하는 철학들을 전부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이 강요된 사회로 경직된 우리는 말해야 할 것들은 말해야 한다. 이에, 무용으로 말하는 철학은 직설적인 언어가 아니라서 부드러운 공감의 힘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올해 무대에 올려진 작품에서 무용예술이 규정된 틀을 깨고 다시 재 탄생되어 대중에게 새롭게 다가서는 빛나는 노력들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문화와 예술이 대중화가 된다는 것은 사람 간의, 계층 간의, 집단 간의 경계를 허무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들에겐 창작(새로운 도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대중에 대한 문화적 배려이며 대중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리고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은 불균형을 극복한, 점차 균형을 찾아가는 회복된 사회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평등한 사회가 별다른 것인가? 무용예술을 포함한 모든 장르의 예술을 다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그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문화와 예술 속에서 피어오르는 평등정신이 아닐까?
고양국제무용제는 그 평등한 문화적 기회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양국제무용제를 힘껏 응원한다. 이 무지개 같은 희망적인 감동을 평범한 나 같은 사람에게 선물하는 이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지자체가 제공하는 수준 높은 문화적 배려와 돌봄으로 힘든 삶의 위안을 얻게 된다. 최고의 대접을 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다만 올해는 스케일이 큰 무대를 보지 못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작년대비 예산이 대폭 줄었다 한다. 에카(Ekah)! 오호 통제라……. 내년에는 한 사람의 고양 시민으로서 문화적 향유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되찾고 싶다. 진정으로….